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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방, 시간의 틈
“여긴… 어디지?”
문득 아버지가 중얼거렸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벽을 향해 앉은 채로. 그 방은 내가 어릴 적부터 보아온 익숙한 풍경이었다. 책장이 하나, 오래된 라디오 하나, 책상 위에 가득 쌓인 종이들과 누렇게 바랜 가족사진 한 장. 하지만 이제 그곳은 시간이 멈춰버린 세계 같았다.
아버지는 늘 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릴 적, 나는 그 방을 감히 함부로 들어가지 못했다. 고요했고, 질서 정연했고, 아버지만의 영역 같았다. 그 방은 책 냄새와 종이 먼지, 잉크향으로 가득했다. 펜을 들고, 독서를 하며 사색하던 아버지의 모습은 나에게 '지식인'으로 각인돼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방은 다른 냄새가 난다. 약 냄새, 피부 연고 냄새, 그리고 가끔은 식은 밥 냄새. 아버지의 서재였던 곳은 이제 돌봄의 공간이 되었고, 추억이 쌓이던 방은 현실의 무게를 견디는 공간이 되었다.
시간은 아버지의 방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책장은 먼지로 덮이고, 시계는 멈췄으며, 사진 속의 미소는 누렇게 바랬다. 그리고 그 속에 앉아 있는 아버지도, 점점 자신이 누구인지, 지금이 언제인지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질문은 반복되고, 답은 점점 줄어든다
“오늘이 며칠이냐?” “너, 학교는 잘 다니냐?” “엄마는 어디 갔니?”
이 질문들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었다. 문제는, 나는 이제 학교에 다니지 않고, 어머니는 이미 10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그때마다 나는 망설인다. 사실을 말할까, 거짓으로 위로할까.
아버지는 어느 날부터 나를 '작은 나'처럼 대했다. 내가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잊은 듯, 식사 때 숟가락을 들려주고, 외출할 땐 조심하라고 옷깃을 여며주며, “네가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이지?”라고 묻는다.
그럴 땐 차라리 그 세계 안에 머물러주고 싶었다. 아버지가 기억하는 시간 속에서, 내가 여전히 아버지의 ‘작은 아들’로 살아가는 그 세계에서. 하지만 현실은 늘 문을 두드린다. 약 시간, 병원 진료, 요양보호사의 전화, 치매 센터의 상담 일정.
책상 서랍 속에서 찾은 편지 한 장
청소를 하다 우연히 아버지의 책상 서랍에서 오래된 편지를 발견했다. 노란 봉투 속에는 다정한 글씨체로 쓰인 한 장의 편지가 있었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당신의 건강이 늘 걱정입니다. 가끔은 강한 척 말고, 기대도 하세요.” 엄마가 쓴 편지였다.
나는 멍하니 그 편지를 읽었다. 그 편지 속에 담긴 엄마의 마음과, 그것을 오랫동안 간직해 온 아버지의 애틋함이 방 안 가득 퍼졌다. 치매가 모든 것을 잊게 만든다 해도, 마음은 어딘가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아버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 편지, 엄마가 쓴 거지?” 나는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생각나. 목소리는 잊었는데, 글씨는 아직 익숙하더라.” 그 말에 나는 눈물이 났다. 아버지는 전부를 잃은 것이 아니었다.
무너지는 감정과, 스스로를 지키는 마음
나는 아버지를 돌보며 수없이 무너졌다. 말을 못 알아듣는 순간, 나를 잊는 순간, 나를 낯선 사람처럼 대할 때마다 무너졌다. 한편으론 화가 났다. 왜 나를 알아보지 못하냐고, 왜 자꾸 똑같은 말을 하냐고, 왜 과거 속에만 머무르냐고. 하지만 알고 있다. 그것은 아버지의 잘못이 아니라 병의 문제라는 걸.
치매는 가족에게 '이별을 준비하는 병'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이별은 너무 천천히, 너무 아프게 다가온다. 살아 있음에도 사라지는 느낌. 눈을 마주쳐도 그 눈 속에 내가 없다는 슬픔. 그런 감정 속에서도 나는 아버지를 지켜야 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방을 자주 정리한다. 과거를 꺼내 들추기도 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들여놓기도 한다.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안정감을 느끼고, 여기가 ‘내 공간’이라고 기억할 수 있도록.
시간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이젠 아버지의 말이 많지 않다. 말보다 침묵이 더 길고, 눈빛은 멍하고 멀다. 하지만 손을 잡으면 반응한다. 손가락에 힘을 주고, 가끔은 미소 짓는다.
나는 그 작은 신호에 기대 하루를 살아간다. 아버지의 방은 이제 다시 고요하다. 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서 나는 여전히 사랑을 발견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버지는 어딘가에서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아버지가 전부를 잊더라도, 나는 기억할 것이다.
아버지가 나를 가르쳐주던 말투, 책장을 넘기던 손길, 나를 부르던 목소리.
그것들은 아버지의 방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방은, 시간이 멈춘 것이 아니라, 추억을 품고 살아가는 또 하나의 현재다.
나는 오늘도 아버지의 방 문을 연다
문을 열면, 아버지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밖에 뭐가 있냐고 물으면, 아버지는 대답한다. “음… 그냥 빛이 좋아서.”
그 말속에, 아버지가 여전히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믿음을 갖는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그 방 안에 머문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그 시간의 틈 안에서, 아버지와 내가 나눈 시간을 다시 꿰매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