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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30대 중반 손자와 80대 후반 치매를 앓는 친할머니의 삶을 담은  에세이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손자를 키운 할머니, 그 사랑에 보답하며 함께 살아가는 손자, 그리고 치매로 인한 갈등과 화해, 주간보호센터를 통한 삶의 변화까지를 그립니다. 현실적인 돌봄의 무게 속에서 가족과 사회가 어떻게 연결되고, 일상의 리듬을 되찾아 가는지, 그리고 사랑이 어떻게 희망으로 자리 잡는지 차분히 따라갑니다.

민수는 올해 서른다섯이다. 사람들은 그에게 왜 결혼을 미루냐고 묻곤 했다. 그는 늘 웃으며 “할머니가 나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니까요”라고 농담처럼 말하지만, 그 속에는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다소 비껴 나 있었다. 부모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혼자 남게 되었다. 시골집에 남은 아이를 품은 것은 할머니였다. 새벽에 논으로 나갔다가도, 해 질 녘 조각난 햇살을 등에 지고 돌아온 뒤에도, 할머니는 민수를 먼저 챙겼다. 겨울밤이면 동치미 국물에 살얼음이 어는 소리를 들으며 온수주머니를 데워 이불속으로 밀어주었고, 여름밤에는 모기향을 피워놓고 부채질을 하며 동요를 흥얼거렸다. 그 작은 손길 하나하나가 민수의 세계를 만들었다. 대학 시절에도, 사회 초년생이 된 뒤에도, 민수는 늘 저녁이면 시골집으로 돌아왔다. 된장찌개에 떠오른 파기름의 고소함, 장독대 가장자리의 흙냄새, 빨랫줄에 걸린 흰 속옷들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까지, 그 모든 것이 민수에게는 “집”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할머니의 말과 행동에 균열이 생겼다. 같은 질문이 반복되고, 저녁에 먹은 반찬을 아침에 또 꺼내놓는 일, 전기밥솥 버튼을 꺼 놓았다 켜 놓았다 하며 긴가민가하는 표정들. 병원에서는 알츠하이머형 치매초기라는 진단을 내렸다. 의사는 가능한 루틴을 유지하고, 안전장치를 마련하라고 조언했다. 민수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병원 화장실에서 혼자 눈물을 닦아냈다. ‘이제는 내가 지켜야지.’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기억과 갈등 사이

처음에는 사소한 실수였다. 설탕 대신 소금을 붓고도 반찬을 내오며 쑥스러운 미소를 짓거나, 텔레비전 리모컨을 전화기인 줄 알고 귀에 대고 “여보슈?” 하고 묻곤 했다. 그럴 때면 민수는 웃으며 “할머니, 전화기는 여기요” 하고 손에 쥐여드렸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할머니는 민수를 ‘옆집 창수’라 부르며 밥을 주었고, 다른 날에는 한참 동안 방문을 붙잡고 “엄마가 나 데리러 올 거야”라고 중얼거렸다. 민수의 가슴은 저릿하게 아려왔다.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운 건 할머니가 스스로를 짐이라 여기는 죄책감이었다. “민수야, 내가 오래 살아서 네 짐만 된다. 나 없으면 너도 편할 텐데…” 그 말이 나올 때마다 민수는 숨을 고르듯 침을 삼켰다. 그는 수십 번, 수백 번 해명했다. “할머니는 내 집이고 내 역사예요. 짐이 아니에요.” 하지만 말은 때로 마음의 벽 앞에서 미끄러졌다. 현실의 피로도 있었다. 민수는 퇴근 후 장을 보고 급히 집으로 돌아와 약을 챙기고, 가스밸브를 확인하고, 밤에는 문마다 잠금장치를 달았다. 한 번은 새벽 다섯 시, 할머니가 대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골목 초입에서 할머니를 발견했을 때, 민수의 다리는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그 후로 그는 GPS 목걸이를 마련했고, 현관에는 도어 알람을 달았다. 그럼에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삶을 오래 버틸 수 있을까?’ 스스로를 책망하는 밤이 이어졌다.

주간보호센터와의 만남

변화의 실마리는 지역 보건소에서 열리는 가족교육에서 찾아왔다. ‘주간보호센터’라는 단어가 민수의 귀에 들어왔다. 아침에 맡기면 낮 동안 전문 요양보호사와 프로그램 속에서 지내고, 저녁식사까지 하고 귀가하는 서비스. 민수는 안내 책자를 집어 들었다. 종이의 질감이 이상하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귀가 후 민수는 조심스럽게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할머니, 여기 가면 친구들도 만나고, 노래도 부르고, 만들기도 한대요. 내가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저녁에 데리러 갈게요.” 할머니는 처음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유치원생도 아닌데, 왜 거길 가.” 민수는 서둘지 않았다. 며칠 동안 할머니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들을 모아 왔다. 가벼운 체조, 손뜨개, 그림 그리기, 옛날 노래. 그리고 첫날, 민수는 새로 산 카디건을 할머니에게 입혀 드렸다. “이거, 할머니랑 딱 어울려요.” 그렇게 주간보호센터의 문턱을 넘어섰다. 첫날은 낯설었다. 할머니는 의자 끝에 걸터앉아 주변을 살폈다. 그때 복지사 김 선생님이 다가와 앉았다. “할머니, 저는 김은서예요. 오늘 간식은 호박죽이에요. 달달하니 속이 따뜻해져요.” 목소리는 햇살 같았다. 점심 무렵 민수가 회사에서 받은 연락에는 “적응 잘하셨고 노래교실에서 ‘고향의 봄’을 따라 부르셨어요”라고 적혀 있었다. 민수는 카톡을 보던 손을 멈추고 한참 동안 그 문장을 바라봤다. 마음속에서 작은 등불이 켜지는 듯했다.

복지사와의 연결, 일상의 리듬 회복

며칠, 몇 주가 지나자 리듬이 생겼다. 아침 8시, 민수는 할머니와 함께 센터 차량을 기다렸다. 기사님이 내리면 민수는 출석카드를 건네고, 요양보호사에게 밤사이 있었던 일들을 간략히 전했다. “어젯밤엔 잠을 좀 설쳤고요, 아침은 반공기 드셨어요.” 저녁 6시가 가까워지면 민수는 퇴근하자마자 센터로 향했다. 문이 열리고, 활동일지가 건네졌다. “오늘은 인지활동에서 카드 매칭을 하셨고, 손뜨개 시간에는 목도리 뜨개 시작했어요. 간식은 바나나와 요구르트, 저녁은 잡곡밥과 닭볶음탕이었고요. 식사량은 70% 정도.” 숫자와 단어가 일상의 안부처럼 쌓여 갔다. 민수는 단순히 맡기고 데려오는 보호자가 아니라, 동료가 되었다. 김 복지사와는 메신저로도 자주 소통했다. 갑작스러운 혼돈의 순간을 대비한 ‘진정 루틴’을 함께 설계했다. 익숙한 음악 틀기, 라벤더 향기 맡기, 창가에 앉아 마당의 감나무를 바라보기. 민수는 집에서도 똑같은 루틴을 반복했다. 그 결과는 놀랄 만큼 확실했다. 밤중 배회가 줄고, 식사량이 조금씩 늘었다. 무엇보다 할머니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센터 행사도 민수는 빠지지 않았다. 봄에는 꽃나들이를 함께 가서 벚꽃 아래에서 사진을 찍었고, 여름에는 실내 놀이 행사에서 탈을 쓰고 장난치는 할머니를 보며 한바탕 웃었다. 가을 김장 날에는 비닐장갑을 끼고 배추 속을 버무리며 “할머니 손맛을 이길 수는 없네요”라고 복지사들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할머니는 민수가 옆에 있으면 더 오래 앉아 있었고, 더 자주 웃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할머니가 민수의 손을 꼭 잡았다. “오늘 참 좋았다.” 그 한마디에 민수의 하루가 정리됐다.

직장에 전념할 수 있게 된 이유

무엇보다 큰 변화는 민수의 일터에서 나타났다. 이전에는 회의 도중에도 휴대전화가 울릴까 조마조마했고, 점심시간마다 급히 집에 전화해 가스밸브와 문단속을 확인했다. 집중은 깨지고, 작은 실수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주간보호센터와 체계가 잡히자 상황이 달라졌다. 오전 9시 시작되는 스탠드업 미팅에서 그는 더는 초조한 눈빛을 숨기지 않아도 됐다. 동료가 “요즘 표정이 편안해졌네”라고 말했을 때, 민수는 짧게 “주간보호센터 덕분이에요”라고 답했다. 점심시간에는 김 복지사가 보낸 활동 사진을 보며 안도했고, 오후에는 프로젝트 문서에 깊게 몰입할 수 있었다. 퇴근 후에는 숨이 턱까지 찬 채로 집으로 달려가지 않아도 됐다. 할머니는 센터에서 저녁을 드시고, 6시가 되면 센터 차량으로 집에 도착해 계신다. 집에서는 간단히 과일을 준비하고, 약을 챙기고, 샤워를 도와드리면 하루가 자연스럽게 마무리됐다. ‘돌봄’이 하루를 점령하던 이전과 달리, 이제는 ‘일-돌봄-쉼’의 균형이 자리를 잡았다. 그 균형이 민수에게 죄책감 대신 책임감을, 피로 대신 지속가능함을 선물했다. 그는 회사의 교육 프로그램에도 참여했고, 업무 제안서의 완성도는 높아졌다. 성과평가 면담에서 상사는 말했다. “요즘 더 깊이 있게 일하네요.” 민수는 속으로 답했다. ‘나 혼자가 아니니까요.’

짐이 아니라 서로의 지지대

할머니의 마음속에는 오래도록 ‘짐’이라는 단어가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주간보호센터를 다니기 시작한 뒤에도, 그 말은 가끔 튀어나왔다. 그럴 때마다 민수는 새로운 방식으로 답했다. “할머니, 사람이 혼자 감당할 수 없는 건 나누라고 세상이 만든대요. 센터는 우리 둘의 친구예요.” 어느 저녁, 센터에서 돌아온 할머니가 식탁에 앉아 물컵을 잡고 말했다. “거기 가면 내 또래들이 많아. 나만 늙은 게 아니더라. 다들 사연이 있고, 다들 누군가의 가족이야.” 그 말은 민수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함께 늙어가는 사람들이 서로를 비추는 풍경, 그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 할머니. 복지사들은 할머니의 과거를 존중했다. 어린 시절 수확철 이야기, 장터에서 흥정하던 요령, 젖은 손으로 밀가루 반죽을 하던 감각들을 끊지 않고 따라가 주었다. 과거를 소중히 다루어 줄 때, 할머니는 현재에 더 잘 머물렀다. 민수는 그 사실을 배웠다. 집에서도 앨범을 펼쳐 사진을 만지작거리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건 내가 다섯 살 때 넘어져 무릎 다쳤던 날.” 어느 봄날 냇가에서 할머니가 먼저 꺼낸 그 기억은 두 사람 사이에 반짝이는 다리가 되었다.

 작은 장치들이 만드는 큰 안전

민수는 돌봄의 기술을 생활 속에 심었다. 현관에는 이름표와 주소가 적힌 카드, 전화번호가 큰 글씨로 적힌 자석 메모, 화장실에는 ‘물 내리기 → 손 씻기’ 그림 안내를 붙였다. 부엌 가스레인지에는 타이머를 달아 자동 차단 기능을 활성화했고, 전자레인지에는 자주 쓰는 버튼에 색깔 스티커를 붙였다. 약상자는 요일별로 분류하고, 스마트 스피커에는 하루 세 번 약 알림을 설정했다. 냉장고 문에는 센터 일정표가, 거실 벽에는 주간 메뉴가 붙었다. 작은 도구들이 쌓이자, 민수의 마음에는 여백이 생겼다. 그 여백에 그는 음악을 틀고, 두 사람이 함께 앉아 귤을 까먹으며 티브이 속 트로트 경연을 보았다. 할머니는 때때로 가사를 틀리게 따라 불렀지만, 민수는 그 틀린 가사까지 사랑했다. 밤에는 라벤더 향을 살짝 뿌리고, 조도를 낮춘 스탠드를 켰다. 잠드는 얼굴이 편안하면, 다음 날의 시작도 부드러웠다.

행사, 기록, 그리고 감사

센터는 단순한 서비스 제공처를 넘어 관계의 거점이 되었다. 월초에는 가족 면담이 있었다. 김 복지사와 사회복지사는 최근 변화, 목표, 어려움을 함께 점검했다. “최근에는 식사량과 체중이 약간 회복됐고, 인지활동 집중 시간이 늘었어요. 다음 달에는 미술활동을 조금 더 늘려볼게요.” 그 기록은 민수에게 지도처럼 느껴졌다. 봄에는 벚꽃길 산책 사진이, 여름에는 실내 행사나 놀이 인증숏이, 가을에는 김장 봉사 스케치가, 겨울에는 실내 합동 콘서트 영상이 앨범에 차곡차곡 쌓였다. 행사 날이면 민수는 쉬는 날을 맞춰 참여했다. 마이크를 잡고 “할머니, 우리가 1등이에요!”라고 외치던 날, 할머니는 아이처럼 박수를 쳤다. 행사 마지막에 민수는 늘 인사를 했다. “선생님들, 고맙습니다. 덕분에 저도 제 일을 지키며 살 수 있어요.” 김 복지사는 웃으며 답했다. “우리는 팀이에요. 보호자님이 있어 가능한 일이죠.” 누군가와 팀이 된다는 감각은 민수를 버티게 했다.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저녁까지 드시고 귀가하는 일과

저녁 6시 반, 차량이 도착하면 할머니는 편안한 얼굴로 내렸다. 센터에서 이미 저녁을 드셨기에, 집에서는 과일이나 따뜻한 차 한 잔이면 충분했다. 민수는 설거지를 하면서도 계속 말을 걸었다. “오늘은 뭐가 제일 재미있었어요?” “글쎄, 카드 맞추기가 재밌더라. 근데 옆에 앉은 친구가 너무 잘해서 내가 졌지.” 두 사람은 함께 웃었다. 식탁 위에는 활동일지가 놓였다. 그날의 기분, 활동 참여도, 식사량과 수분 섭취, 약 복용 여부가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민수는 그 기록을 보며 다음 날의 루틴을 조정했다. 피곤하다는 표시가 있으면 일찍 재웠고, 집중도가 좋았던 날이면 집에서도 간단한 색칠놀이를 준비했다. 작은 조정이 다음 날의 컨디션을 바꾸었다. 잠들기 전, 민수는 늘 같은 말을 했다. “할머니, 덕분에 내가 여기 있어요. 고맙습니다.” 할머니는 대답했다. “나도 네 덕분에 사네.” 그 간단한 문장들이 집을 지탱했다.

 죄책감에서 책임감으로

돌봄의 핵심은 감정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었다. 예전의 민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죄책감에 흔들렸다. ‘내가 더 잘했어야 했는데’, ‘왜 짜증을 냈을까’, ‘이렇게 살면 내 삶은 어떻게 되나’. 그러나 주간보호센터라는 제3의 어깨가 생기자, 감정의 무게중심이 옮겨 갔다. 그는 ‘나 혼자’에서 ‘우리’로 시선을 옮겼다. 실수를 기록하고, 피로를 예측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책임감은 죄책감을 대체했다. 돌봄은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았다. 꾸준함과 협력이 전부였다. 할머니가 가끔 민수를 ‘창수’라 불러도, 민수는 그 이름으로 대답했다. “네, 창수예요. 밥 드셨어요?” 중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안전과 안심이었다. 그 마음가짐이 할머니의 표정을 부드럽게 하고, 민수의 눈빛을 단단하게 했다.

함께 걷는 남은 길

어느 봄날, 민수는 휴가를 내어 할머니와 어릴 적 자주 가던 냇가로 갔다. 살구꽃이 흩날리고, 물 위에 햇살이 반짝였다. 할머니는 잠시 물가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말했다. “여기… 네가 다섯 살 때 넘어져 무릎 다쳤던 데다. 내가 업고 집에 갔지.” 그 순간, 민수는 시간을 건너온 따뜻한 손을 느꼈다. 기억은 휘발되지만 마음은 남는다는 사실, 잊히는 중에도 서로를 붙드는 무언가가 있다는 믿음이 그의 어깨를 감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민수는 마음속으로 반복했다. ‘기억의 길이가 아니라 순간의 온도.’ 센터에서의 하루, 집에서의 저녁, 작은 노래 한 소절, 귤 한 조각. 그것으로 충분했다. 민수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말했다. “할머니, 저는 할머니 덕분에 여기까지 왔어요. 앞으로도 같이 가요. 천천히, 오래.” 할머니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래, 우리 같이 가자.” 그 대화는 약속이었다. 내일을 담보하지 않되, 오늘을 충실히 사랑하겠다는 약속. 민수는 알았다. 희망은 거창한 미래 계획이 아니라, 지키는 오늘에서 자란다는 것을.

요약과 다짐, 그리고 감사를 담아

이 이야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치매는 기억을 앗아가지만, 사랑을 지우지 못한다. 주간보호센터와 같은 사회적 돌봄은 가족의 어깨에서 절망을 덜어내고, 관계의 온기를 회복시킨다. 민수는 센터 복지사와 자주 연락하며 변화를 기록했고, 행사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할머니의 사회적 연결을 지켜냈다. 저녁까지 센터에서 든든히 드시고 돌아오는 루틴 덕분에, 그는 직장에 전념하며 자신의 삶도 잃지 않았다. 결국 돌봄은 혼자 버티는 것이 아니라 함께 방법을 찾는 과정이었다. 오늘도 민수는 퇴근 후 아파트 현관문을 열며 할머니 하고 부른다. 그리고 TV를 보시다 반겨주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는다. “오늘 센터에서 재미있었어요?”   "응, 그래"그 말속에 이분들의 내일이 있다.

 

손자와 할머니
손자와 할머니